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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동’이라는 장소에 담긴 기억의 층위와 감정


/ 조계원_고려대 평화&민주주의연구소 연구교수





1973년 7월 1일 경기도 광주군 성남출장소가 성남시로 승격되면서 만들어진 태평동(太平洞)에는 몇 가지 기억의 층위와 사회적 감정이 누적되어 있다. 첫 번째는 1968년부터 1970년까지 3년간 무허가 건물에 거주하는 철거민을 집단 이주시켜 정착시키려는 서울시의 계획 하에 만들어진 광주대단지의 기억이다. 이곳은 도시 빈민의 생존권 투쟁이 일어난 결여의 장소임과 동시에 ‘내 집 마련의 꿈’을 실현할 욕망의 장소이기도 했다. 두 번째는 과거 성남시청을 중심으로 상권이 발달되어 있었던 곳이 분당 개발과 시청 이전으로 차츰 쇠락하여 도시재생사업의 대상이 되었다는 기억이다. 이 사업이 불러일으키는 것은 재개발에 대한 기대인가, 아니면 자신이 사는 터전에 애정인가? 마주하고 싶지 않은 것은 어쩌면 자신이 속물의 세계와 이웃사랑을 오가는 공동체의 일원이라는 사실에서 오는 부끄러움일 것이다.




1. 결여와 욕망의 이중적 장소

『성남시사』에 따르면 태평동(太平洞)은 1973년 7월 1일 경기도 광주군 성남출장소가 성남시로 승격되면서 만들어진 행정동이다. ‘근심 걱정이 없는 태평한 지역을 만들자’는 뜻으로 이름을 지었다는 사실은 다른 의미에서 보면 이곳이 ‘근심 걱정이 많은’ 장소였다는 뜻이기도 하다. 원래 산림지대였던 이곳은 서울시가 1968년부터 1970년까지 3년간 무허가 건물에 거주하는 철거민을 집단 이주시켜 정착시키려는 계획 하에 경기도 광주군 중부면(수진리·탄리·단대리·상대원리 등 4개 리) 일대에 조성한 대규모 주택 단지(광주대단지)의 일부가 된다. 이 지역은 도시 개발을 위해 삶의 기반을 뿌리 뽑힌 채 쫓겨난 사람들을 위해 ‘개발’된 공간이었다. 광주대단지 지역은 임야가 총 면적의 60%를 차지해서 택지 개발이 어려운 구릉 지대였지만, 토지 매수 지역의 80%가 국·공유지였기 때문에 싸게 매입할 수 있다는 이유로 선택되었다.[1]  도로 교통이 불편하여 서울과의 근접성이 떨어지는 공간적·사회적으로 고립된 곳이기도 했다(성남시사편찬위원회 2014, 58-61). 최초의 수도권 ‘신도시’[2] 건설은 철거민 집단 이주 정착지 조성 정책의 산물이었으며, 이런 의미에서 인구분산을 위한 도시 ‘개발’보다는 도시빈민의 합법적인 ‘추방’에 가까웠다(박홍근 2015, 241).

광주대단지는 ‘집이라는 장소를 상실하고 추방당한 사람들’을 위한 공간이었다는 점에서 그 탄생부터 태평하기 어려운 결여의 장소였다. “무단 토지 점유와 불법 주택 건설을 일삼는 철거민들에게까지 선심을 쓸 만한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성남시사편찬위원회 2014, 71). 그래서 도시에 거주할 권리를 결여하고 있는 철거민들은 서울 중심부에서 남쪽으로 약 20km 떨어진 곳에서 자신의 결여를 처절하게 경험해야 했다. 서울시는 ‘선입주 후건설’ 방식에 따라 최소한의 생활 조건이 갖춰지지 않은 상태에서 무작정 도시 빈민을 강제로 이주시켰다. 토지 정지 작업에 들어간 지 2개월만인 1969년 5월부터 청계천변, 철도변 등의 철거민들을 집단적으로 입주시키기 시작했는데, 1971년까지 3년 동안 그 수가 12만 4165명(2만 4833가구)에 달했다. 철거민[3]들에게는 각각 20평의 대지가 추첨으로 분양되었지만, 당장 생계도 막막했기 때문에 대부분 주택을 짓는 것은 엄두도 내지 못했다. 1970년대 초까지 광주대단지의 생활여건은 “살 곳도 먹을 곳도 일할 곳도 없는 참담함 그 자체”였다(성남시사편찬위원회 2014, 65-7). 대다수 철거민 입주자들은 불안한 삶을 사는 빈곤층 노동자들이였는데, 허허벌판이나 다름없는 광주대단지에서 생계를 유지하기 어려웠다. 버스로 서울까지 2시간 반 정도(1970년 말 기준) 걸렸기 때문에 교통비와 시간 등을 감안하면 출퇴근도 불가능했다. 그래서 초기에 이주한 철거민들의 절반 가까이가 서울로 돌아갔으며, 일부는 분양증을 판 돈으로 단지 안에 무허가 건물을 짓고 살았다(성남시사편찬위원회 2014, 73-5).

다른 한편으로 광주대단지는 ‘집이라는 장소를 원하는 사람들’을 위한 욕망의 공간이기도 했다. 서울시는 1968년 4월 4일 「한강 이남에 ‘제2의 서울’」이라는 계획을 발표한 지 1개월 만에 광주대단지 사업을 발표했으며, 이 사업을 ‘35만 명 규모의 새 위성 도시 건설’, ‘대전시 규모의 새 도시 건설’ 등으로 홍보했다(성남시사편찬위원회 2014, 58-60). ‘광주대단지에 가면 싼 값에 집을 살 수 있다’, ‘광주대단지에 살판 났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저렴한 돈으로 주택을 마련할 수 있다는 기대를 가지고 광주대단지로 이주하는 사람이 늘어났다. 분양증을 매매하여 큰 이득을 보려는 부동산 투기업자들은 철거민들에게 웃돈을 주고 분양증을 팔도록 유도했고, 이 분양증을 새로운 입주자들에게 불법적으로 전매했다. 이 과정에서 돈을 모두 쓴 ‘전매 입주자’들은 천막을 치거나 판잣집을 짓고 살았고, 여유가 있는 사람들만 주택을 짓고 살았다. 1971년 서울시의 조사에 따르면 광주대단지 내 철거민수는 4만 1596명이었는데, 전입자수는 6만 8623명으로 1.6배가 많았다(성남시사편찬위원회 2014, 67-9). 이들이 이곳에서 열악한 주거 조건을 견뎌낼 수 있었던 것은 ‘내 집’ 마련의 꿈과 부동산 가격 상승에 대한 기대가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정주아 2016, 259). ‘내 집’을 갖는다는 것은 삶의 터전이 되는 장소를 갖게 된다는 의미를 뛰어넘는다. 그것은 자본 축적의 욕구를 실현할 수 있는 수단을 지닌 주체(도시에 거주할 권리를 지닌 중산층)가 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1971년 8월 10일, 3~6만 명의 주민들이 대규모 시위를 벌인 ‘광주대단지 사건’은 결여와 욕망의 장소성[4]이 유발하는 감정이 중첩되어 집합행위로 드러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결여의 장소성은 주로 철거민 집단의 경험과 관련되어 있다. 강제 이주를 위해 급조된 취약하고 불안한 공간 속에서 최소한의 생존권을 박탈당한 도시 빈민들은 공포와 분노의 감정을 경험할 수밖에 없었다. 국가 권력은 ‘집단 수용소’와 같은 공간에 강제로 거주하도록 하여, 이들이 국가의 보호에서 벗어난 배제된 존재임을 각인시켰다(조명래 2013, 49). 최소한의 존엄성조차 유지할 수 없는 조건에서 누적된 분노는 집합행동 과정에서 격분으로 표출되었다(김왕배 2020, 108-9). 시위대는 서울시 소속 광주대단지사업소 건물에 가서 집기를 훼손하고, 관용 차량 1대를 방화했으며 2대를 넘어뜨렸다. 또한 시영버스를 뺏어 타고 “청와대로 가자”는 구호를 외치면서 서울시로 진출하려고 시도했다. 이 사건으로 인해 21명이 구속·기소되었는데, 대부분 철거민 입주자들이었다(성남시사편찬위원회 2014, 101-3).

욕망의 장소성은 전매 입주자들의 불만과 관련된다. 1971년 7월 13일, 서울시는 한 차례 유보했던 전매 행위 금지, 전매 입주자의 분양 재계약 및 분양 대금 시가 일시불 납부, 철거민의 택지 대금 일시불 납부를 공고했다. 전매 입주자들은 이러한 조치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했다. 10~15만 원을 주고 분양증을 매입했는데, 여기에 16~32만 원의 분양 대금을 일시불로 납부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들은 7월 17일 ‘분양지불하가격시정대책위원회’(나중에 투쟁위원회로 바뀜)를 구성하여 집단 민원을 제기하는 등 적극적 대응에 나선다. 대책위는 8월 10일에 궐기대회를 개최하기로 하고 현수막과 전단지를 배포하여 주민들의 참여를 독려하는 한편, 토지불하가격 인하와 취득세 면제라는 요구를 고수하면서 서울시의 타협안을 거부했다(성남시사편찬위원회 2014, 87-93). 그러나 8월 10일 당일 이들의 예상과 달리 철거민과 기타 공조세력이 참여하면서 궐기대회가 대규모 시위로 확대되었으며, 서울시가 모든 요구를 수용하겠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사건 시작 6시간 만에 종료된다. 이들의 행위를 추동했던 것은 ‘불하가격 시정’으로 대표되는 재산권 보호를 위한 욕망이었다(임미리 2012, 241-5). 실제로 이 사건으로 직접적인 혜택을 본 것도 전매 입주자였으며, 월동대책비와 취업대책비가 투입되기는 했지만 단지 내 이주민의 생활 여건이 크게 개선되지는 않았다(임미리 2012, 251-3). 광주대단지 사건 이후 대단지 건설 사업이 서울시에서 경기도로 이관되면서 성남시로 승격되었고, 태평동이라는 이름이 생겼다. 그러나 빈곤과 사회적 소외는 여전히 지속되어서 이곳에서 태평하기란 쉽지 않았다.



2. 재개발과 재생 사이의 도시

1990년 이후에는 분당과 판교에 대규모 주거지형 신도시가 건설되면서, 또 다른 차별과 배제가 발생했다(성남시사편찬위원회 2014, 108-9). 1970년부터 조성된 원도심과 1990년대 초에 건설된 분당 신도심으로 양분화된 성남시의 공간 구조에서, 원도심의 하나인 태평동은 상대적 박탈감 속에서 선망과 질시의 감정[5]을 만들어내는 장소가 되었다. 태평2동에 있었던 시청사 이전과 상권의 쇠퇴, 건축물의 노후화와 부족한 기반시설로 인한 인구 유출, 자족기반 부족으로 인해 원도심과 신도심의 격차는 지속적으로 증가했다. 중심지역에서 주변지역으로 재조정되는 이러한 과정에서 주민들은 과거에 누렸고, 누릴 수 있다고 기대하는 가치가 자신에게 결여되어 있음을 인식하면서 피해의식과 좌절감을 느끼는 한편, 경쟁자가 지닌 재화를 갈망하고 경쟁자를 적대시하는 집단적 감정을 경험하게 된다(부산대학교 한국민족문화연구소 2013, 8). 이는 서울로 대변되는 중앙의 문제해결을 위해 지방/주변에 신도시를 찍어내듯 만들어 온 국가권력과 자본의 힘이 만들어낸 지방 내부의 분화와 갈등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조명래 2011, 59-60).

태평동은 구릉지 경사지형에 작은 필지 형태로 노후 주택이 많고, 도로·주차장·공원 등과 같은 기반시설이 열악한 상황이어서 2009년부터 도시정비구역으로 지정되어 있었다. 태평2·4동은 2014년에 지정 해제되었고, 재개발이 지니는 문제점(사업성 저하로 인한 높은 주민 분담금 증가, 낮은 원주민 재정착률)을 개선하기 위해 2015년 국토교통부의 도시재생사업(일반근린형)에 공모하여 2016년부터 사업이 진행되고 있다(성남시 2020, 7-8). 『2030 성남시 도시·주거환경정비기본계획』(2019.6)을 보면 태평3동은 정비예정구역(재개발사업)이며, 태평1동은 정비예정구역에서 해제되었다. 태평동 내에서도 도시재생구역과 재개발구역 등으로 나뉘어 있는 것이다.

도시재생사업이 진행되고 있는 태평2·4동을 중심으로 생각해보자.[7] 전 지역이 제2종 일반주거지역에 속하는 이곳은 전체 토지 중 94.15%가 필지 면적 90㎡(27.2평) 이하이고, 폭 4m 이하의 협소한 도로가 61%를 차지하며, 대부분의 건물이 벽돌과 블록으로 이루어진 조적조 구조로 노후화되어 있다. 이곳에는 녹지와 필지 내 주차장도 거의 없다. 이러한 모습은 결여의 장소성이라는 역사적 층위를 직접적으로 드러낸다. 또한 이곳은 정비구역으로 지정되어 있던 2009~2014년 사이에 많은 토지가 부재지주에게 매각되어 부재지주 비율이 45%에 달한다. 재개발 이익을 추구하면서 욕망의 장소성이 재현된 것이다(태평동 전체 토지의 약 20%가 이 시기에 부재지주에게 매각되었다). 도시 재생에 반대하고, 재개발 시행을 요구하는 ‘태평2동4동재개발추진위’는 이러한 욕망을 대변한다. 태평2·4동은 외곽순환도로, 분당수서간도시고속화도로 및 분당선과 8호선 지하철역이 가까이에 있으며, 태평로를 사이에 두고 근처에 503세대 아파트단지가 있고, 태평3동이 재개발사업 지역이 되면서 개발에 대한 선망이 강해질 수밖에 없는 조건을 가지고 있다. 이와 같은 누적된 역사적 층위와 기억들이 이곳의 장소성을 강하게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

2013년에 제정된 「도시재생 활성화 및 지원에 관한 특별법」에 따르면, 도시재생이란 “인구의 감소, 산업구조의 변화, 도시의 무분별한 확장, 주거환경의 노후화 등으로 쇠퇴하는 도시를 지역역량의 강화, 새로운 기능의 도입·창출 및 지역자원의 활용을 통하여 경제적·사회적·물리적·환경적으로 활성화시키는 것”을 말한다. 도시재생사업은 전면 철거 후 재개발이라는 성장 일변도 중심의 도시개발사업의 한계와 부작용에 대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했으며, 노후하거나 쇠퇴한 지역의 공간에 대한 물리적 환경 개선을 넘어 지역을 사회·경제·문화적으로 재활성화하고 도시의 장소성을 확보하여 종합적인 발전을 추구한다(오영삼·김수영·정혜진 2019, 111-2). 도시재생사업을 통해 태평동의 장소성을 확보 또는 재구성하려면, 누적된 역사적 층위가 발생시키는 압력을 이겨낼 수 있는 새로운 경험과 집단적 감정이 형성되고 이곳에 녹아들어 장소 애착을 만들어내야 한다. 이는 도시재생사업이 얼마나 주민들의 삶 속으로 들어가 자발적인 참여를 이끌어내고, 태평동이라는 삶의 터전에 대한 애착을 만들어낼 수 있는지에 달려있다.

2018년 8월 3일부터 9월 7일까지 태평2·4동 주민 1,077명을 대상으로 한 방문면접조사 결과(성남시 2020, 55-6)를 보면, 현재의 주거환경에 대해 불만족스럽다고 응답한 사람이 43.6%였다. 하지만 ‘부담 없는 집값’(29.1%), ‘편리한 교통’(28.7%) 등을 이유로 만족한다고 응답한 사람도 많았다. 도시재생 사업에서는 주민들의 참여가 중요하다. 공동체 활성화와 주민들의 의사결정으로 사업이 진행되기 때문이다. 이곳에서도 주민설명회, 도시재생대학, 주민간담회 및 인터뷰, 주민협의체 회의 등을 통해 지역 내 다양한 이해관계자의 의견을 수렴해서 지역현안을 도출하고 사업을 발굴하는 과정을 거쳤다. 이렇게 선정된 재생활성화사업의 필요도를 묻는 질문에 대해서는 ‘노후 상하수도 정비’(96.6%), ‘범죄예방 환경설계’(92.9%), ‘주차장 조성’(91.7%), ‘전선지중화’(86.6%), ‘쉼이 있는 골목길’(83.4%) 등 물리·환경적 개선과 관련해서는 필요하다는 응답이 높았다. 그러나 주민역량강화사업(41.9%)이나 ‘청년임대주택 및 창업인큐베이터 조성’(61.2%), ‘지역과 함께하는 사회적 기업 육성’과 관련해서는 필요하다는 응답이 상대적으로 낮았다. 아직까지는 결여의 장소성을 완화하기 위한 사업이 우선시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자칫 도시재생사업이 불러일으키는 것이 다른 형태의 재개발에 대한 기대라면, 이는 욕망과 선망의 장소성을 강화할 수도 있다. 문화와 예술을 통한 도시재생이 임대료를 높여 원래 거주했던 주민들을 밀어내는 젠트리피케이션 현상을 초래하는 것을 여러 곳에서 볼 수 있었고(손은하 2017), 도시재생사업은 축소 시대의 ‘성장 기계’(Growth Machine)로서 국가 주도의 사업(도시재생뉴딜)으로 추진되고 있는 상황이다(이영아 2018). 실제로 경기도 곳곳에서 도시재생사업을 진행하면서 땅값이 상승한 사실[8]에서 이러한 기대를 읽어낼 수 있다.

결여의 장소였던 태평동에 살면서 이곳에 생생한 삶의 체험과 추억을 간직한 사람도 생겨났다. 떠나고 싶어도 새로운 곳의 집값을 감당할 수 없어서 떠나지 못하는 사람도 있고, 집값이 싸서 이곳에 들어온 사람도 있다. 그러나 의도했든 그렇지 않았든 한 곳에서 부대끼고 살아 온 사람들 사이에는 이웃사랑과 같은 공동체 의식이 생기게 된다. 먹고 살기에 바쁘고 빡빡한 현실 속에서 삶터를 재생하는 일에 관심을 갖기란 쉽지 않다. 삶터와 일터가 떨어져 있는 경우가 많고, 일터를 따라 삶터를 옮겨다녀야 하는 상황에서 특정한 장소에 애착을 갖기도 어렵다. 하지만 어쩌면 마주하고 싶지 않은 것은 자신이 ‘먹고사니즘’이라는 속물의 세계와 이웃사랑을 오가는 공동체의 일원이라는 사실일 것이다. 먹고 살기 위한 생존경쟁 속에서 우리는 외로울 수밖에 없고, 이로 인한 고립에서 벗어나 연결되길 원한다. 동네에서 마주칠 때 눈인사를 나눌 수 있는 소소한 인간관계만으로도 삶은 풍요로워진다. 우선적으로 재생해야 하는 것은 공동체 내의 이러한 다양한 관계망이다. 관계가 늘어날 때 장소에 대한 애착도 증가하고, 삶터의 문제에 대한 참여도 활발해지기 때문이다.








[1] 택지 조성을 위한 정지 사업은 1969년 3월에 시작되었는데, 사업지의 60% 이상이 산림지여서 가파른 지형과 암반 지질을 정지하기 위해서는 대규모 토목 공사가 이뤄져야 했다. 하지만 예산 부족으로 서울시가 낮은 정지 작업비를 고수했기 때문에 시행 업체는 표피만 벗겨내는 산림 개간 수준에서 택지와 도로를 만들었다. 현재 성남 원도심 지역의 택지와 도로가 가파른 지형에 위치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성남시사편찬위원회 2014, 64-5). 성남출장소 건물이 있던 곳이 성남시 수정구에서 가장 높은 산등성이에 자리 잡고 있는 현재의 태평4동이다. 이곳은 당시 도시계획의 상징인 ‘20평(실평수 13평)짜리 격자형 구도’에 따라 작은 평수의 주택들이 밀집해 있으며, 정착 1세대들이 가장 많이 거주하는 지역이기도 하다(박승현 2006, 84-5).

[2] 국토교통부에 따르면 우리나라에서 현대적 의미의 신도시가 본격화된 것은 60년대 이후이며, 국토 및 지역개발과 대도시 문제해결이라는 두 가지 정책목표에 의해 이루어졌다. 최초의 신도시 건설은 울산 신시가지이다. 그러나 대도시 문제해결을 위한 위성 도시 성격의 신도시 건설은 광주대단지가 최초이다. https://www.molit.go.kr/USR/policyData/m_34681/dtl?id=522 (최종검색일: 2020/12/05)

[3] 철거민도 무허가 가옥주와 주거 세입자 등과 같은 여러 집단으로 구성되어 있다(최인기 2009, 194-5). 철거 가옥에 살던 세입자들에게는 입주권이 부여되지 않았는데, 이들은 자신들에게도 입주권을 인정해 달라며 집단행동을 하기도 했다(성남시사편찬위원회 2014, 83-4).

[4] “추상적 실재인 공간과 달리 장소는 특정 사건이 특정 위치에서 지속적으로 발생하고 그것이 주체에 의해 체험되면서 의미가 부여되는 장이다. 이때 사건의 위치는 단순히 지리적 좌표가 아니라 사회적 관계 속에서 설정되는 상황이며 상호작용이 일어나는 맥락이기도 하다. 이는 장소가 특정한 맥락 속에서 의미를 갖게 되는 구체적 공간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장소의 이러한 성질을 장소성이라 부른다”(조명래 2013, 156).

[5] 선망은 기본적으로 비교에 기반하고 있으며, 내가 남보다 우월해지길 바라는 욕구를 수반한다. 상대의 우월함으로 인해 내가 열등하게 느껴지기 때문에 상대에 대한 미움, 적대감, 분노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으며, 집단적 연대나 사회적 정의의 추구로 이어지기 어렵다(김미현 2018, 207-8).

[6] 정비구역 지정 당시 태평2·4동은 전면 철거 후 재개발을 거쳐 지상 15층 이하(인근에 성남비행장 때문에 고도제한이 있음) 아파트 4688가구를 건립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부동산 경기 침체와 재무구조 악화로 한국토지주택공사가 사업 불참을 선언했고, 성남시도 3조4000억 원에 이르는 사업비를 조달하기 어려워 사업 중단이 결정되었다(한겨레신문 2014/01/09). http://www.hani.co.kr/arti/area/area_general/619197.html (최종검색일: 2020/12/05).

[7] 아래의 현황은 성남시(2020)에 바탕한 것이다.

[8] 인천일보(2019/05/13). http://www.incheonilbo.com/news/articleView.html?idxno=944786 (최종검색일: 2020/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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