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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섬으로 남을 사람들 


/ 강지윤_시각예술가



호흡을 질료로 삼는 퍼포먼스 <숨>은 타인의 숨과 자신의 숨을 더해 하나의 소리 풍경을 만드는 작업이다. 이는 기존 작업이던 2019년 퍼포먼스 작업 <긴 숨과 한 숨>과 유사한 방식으로 재제작한 것이지만, 마스크를 쓴 퍼포머들이 넓은 공간을 거리두기의 방식으로 배회하고, 투명한 마스크의 표면이 입김으로 뿌옇게 흐려지는 장면에서 코로나 시대를 떠올릴 수밖에 없게 한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코로나 시대의 비참함은 조금 밀쳐두고, ‘거리두기’의 관계, 청각적인 관계, 잠시 잠깐 연결되었다가도 홀로 남는 관계들에 대해 생각해보기로 하자. 1인 가구들로 구성된 <숨>의 참여자들은 연결되어 있지만 혼자만의 소리 풍경을 만들어내고, 타인에게 묻되 자신을 위한 질문을 만들어나간다. 이는 타인의 호흡을 의식하되 스스로의 호흡에 집중하는 퍼포먼스의 과정과 닮아있다. 이로써 우리는 공동체로 단단하게 결속되기 보다는 혼자를 잘 기르는 방법을 터득한다.




호흡 곤란의 시대

흔히 쓰이는 말 중에 ‘숨쉬듯 한다’는 말이 있다. 쓰이는 맥락마다 다르긴 하겠지만 대체로 ‘자연스럽다’, ‘쉽다’와 같이 긍정적인 사인을 보내는 말이었다. 이제 그것은 완전히 과거의 용법이 되었다. 그 말이 지닌 의미가 지금처럼 궁색해진 때가 또 있었을까?

2020년 1월 20일, 공식적으로 한국에서 Covid-19 감염자가 처음 확인된 이후 4차 대유행이라는 최근에 이르기까지, ‘숨’이라는 것을 이토록 민감하게 인식했던 적이 없었다. 2년 전만 해도 숨은 쉬는 것이 아니라 그냥 쉬어지는 것에 가까웠다. 그러한 자연스러운 호흡 행위는 이제 마스크에 가로막혀 지극히 의식적인 것이 되었고, 일정 거리 이상 가깝게 느껴지는 타인의 숨결은 안전을 위협하는 것이 되었다. 비유이자 그 자체로도 생명과 살아있음을 의미하던 ‘숨’이 아이러니하게도 삶을 위태롭게 만드는 요소가 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참여자의 호흡을 질료로 삼아 만들어지는 퍼포먼스 <숨>은 이미 의미심장한 것이 되었다.

영상 화면에 담긴 퍼포먼스는 회색의 단정한 공간에서 고요하게 진행된 것처럼 보이지만, 그 이면에는 좀처럼 가라앉지 않는 확진자 수에 따라 오르내리는 불안한 마음이 있었고, 잘 쉬어지지 않는 숨으로 호흡을 하면서 다른 사람들의 숨소리를 듣는 긴장된 몸이 있었다. 퍼포먼스 내내 투명한 마스크 위에 뿌옇게 서렸던 입김이 이런 불안감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았다.




호흡을 맞추다

<숨>은 2019년 제작된 <긴 숨과 한 숨>의 퍼포먼스를 올해 성남의 <혼자를 잘 기르는 시간>이라는 워크숍 참여자들과 함께 재제작한 것이다. 이 퍼포먼스는 타인의 숨소리 위에 자신의 숨소리를 더해 하나의 소리 풍경을 만드는 것으로, 호흡이라고 하는 생존의 기본 행위이자, 그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평소에는 좀처럼 의식되지 않는 특성을 참여자 집단 특성과 연결시킨 작업이다. 2019년 당시에는 8명의 여성들과 함께 제작하였고, 올해는 혼자 사는 1인 가구들을 중심으로 모집했다. 둘 모두 주류 사회에서 대표성을 띄기 어려운 집단으로 이들의 (숨)소리를 모아 가시화하는 것이 이 프로젝트의 목표였다.

먼저 퍼포먼스는 퍼포머들이 정해지지 않은 순서로 등장해 각자의 위치를 정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이 때 퍼포머들은 현재의 ‘거리두기’ 방침처럼 서로 방해되거나 불편하지 않을 정도의 간격을 스스로 설정한다. 이들의 관계는 친밀하다고는 말하기 어려운 정도인데, 이를 반영하기라도 한 듯 퍼포머들의 거리는 일정 간격 이상 벌어진다. 따라서 이들이 그려내는 관계의 모양은 매번 달라지지만 각 꼭지점이 되는 사람들의 간격은 균일한 정도로 떨어져있다. 이 간격은 참여자 개인간의 관계뿐 아니라 코로나 시대에서의 관계의 거리감 역시 내포한다. 얼굴을 맞대고 대화를 나누고 식사를 하던 과거가 얼마나 아득해졌는지. 그렇게 모든 이들의 자리가 정리되면 누군가의 소리를 필두로 하여 본격적인 퍼포먼스가 시작된다.

동선과 마찬가지로 정해진 악보가 없으므로 이들이 만들어내는 소리의 형태와 길이 역시 매 회 달라진다. 이번에 우리는 조금 어색한 첫 번째 시도 이후에 약 7회 정도의 시도를 했는데 매번 다른 장소와 시간을 상상하게 하는 소리 풍경들을 만들 수 있었다. 아무것도 아닌 숨소리를 몇 사람이 함께 내는 것만으로도 바람 부는 광활한 초지나, 바람이 부는 바닷가의 풍경과 같은 거대한 무언가를 그려낼 수 있다는 것이 새삼 놀라웠다.

분명 숨으로 낼 수 있는 소리에는 한계가 있고, 또 그것이 본격적으로 훈련을 받지 않은 일반인인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그러나 그저 쉬쉬-나  휘이이이-, 후우우-투투- 정도의 단조로운 소리는 다른 이들의 단조로움과 중첩되면서 상상의 여지를 갖는 복합적인 소리로 변모한다. 또 서로의 소리를 거울삼아 더 다양한 소리를 내게 되기도 한다. 그래도 숨소리는 그저 별 것 아닌 숨소리일 뿐인데, 고작 몇 사람의 숨소리를 쌓아 올렸다고 거대한 풍경이 어렵지 않게 지어지는 것에는 어쩐지 경이로운 구석이 있다. 내가 1의 힘만 주어도 10으로 나아가는, 방향을 정하지 않아도 쑥쑥 나아가는 배에 올라탄 기분이다. 들릴 듯 말 듯한 나직한 숨소리부터 힘을 주어 세게 부는 숨소리까지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풍경은 점점 확실해진다. 이 작업을 계획할 때 참여자들 간에 유대를 쌓아 일종의 연대를 만든다는 식의, 그런 거창한 것을 생각한 것은 아니지만 나도 모르게 고양감이 드는 것만은 어쩔 수가 없었다.

인이어[i]를 착용한 참여자들은 다른 사람들의 호흡소리를 귓가에서, 아니 귀 안쪽에서 바로 들을 수 있었고 이것은 우리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더욱 실감나게 했다. 누구의 것인지 모르는 숨소리들이 머릿속에서 울렸다. 모든 이들의 호흡 소리가 뒤섞였다. 심지어 마스크 안에서 맴도는 자신의 숨소리 역시 마이크를 타고 귓속으로 들어왔으므로 피아의 구분도 흐릿해졌다. 자신에게 집중하고 있는 동시에 서로에게 집중되어 있는 감각이 낯설었다. ‘호흡을 맞춘다’라는 관용어의 뜻이 그러하듯이 타인을 충분히 의식하면서도 호흡이라는 가장 기본적이고 내밀한 행위에 집중하는 것, 그래서 서로의 속도와 높낮이, 세기를 어울리게 하는 것이 이 프로젝트의 유일한 규칙이었다.

퍼포먼스는 시작된 것과 마찬가지로 약속 없이 종료된다. 재미있게도 소리는 일종의 사회적 합의로써 기승전결 구조를 갖게 된다. 클라이막스를 지난 소리는 점점 작아지며 종료될 시점을 암시한다. 그러나 정확한 때를 알 수는 없다. 마주 서지 않고 무작위에 가까운 방향으로 선 사람들은 눈짓으로조차 서로에게 신호를 보낼 수 없으므로 마지막 사람의 숨소리가 끝날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는 도리가 없다.

퍼포먼스가 진행되면서 우리 눈앞에 풍경이 드러나는 것처럼, 호흡을 맞추는 연결의 감각은 서서히, 그러나 분명하게 고조되었다가 사그라든다. 유대나 연대라고 부를 수는 없지만 분명 연결된 감각이다. 그것이 퍼포먼스가 진행되는 짧은 시간 동안에 신기루처럼 나타나는 것일지라도.




청각적인 사이

이 퍼포먼스가 포함되어 있던 워크숍 ‘혼자를 잘 기르는 시간’은 Covid-19의 영향으로 참여자 모집부터 순탄하지 않았다. 예상했던 것보다 참여자 신청은 저조했고, 힘들게 모인 소수의 인원들과 만날 때에는 ‘거리두기’를 위해 황량할 정도로 넓은 공간에서 모여야 했다. 몇몇 모임들은 온라인으로 진행되었다. 당연하게도 이런 일들은 비단 이 워크숍에서만 벌어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코로나 이후 우리가 마주한 비대면의 세계는 가까운 관계에서 먼 관계로, 또 보는 관계에서 듣는 관계 쪽으로 이동하고 있는 듯하다. 시각적 경험은 여전히 유효하지만 청각은 과거에 비해 훨씬 더 중요해졌다. 과거에 얼굴을 보고 나누는 대화는 시각적인 경험에 더 가까웠다. (이 경우 소리는 그저 보는 것에 자연스럽게 뒤따르는 것이었다.) 그러나 온라인에서 나누는 대화는 보다 더 집중된 청각적 경험이다. (여기에서 화면이 송출되는 것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마치 자연스럽게 호흡하던 숨이 이제는 의식적인 호흡으로 바뀐 것처럼, 같은 행위가 갖는 의미가 조금씩 달라지고 있음을 느낀다.

실제 이 워크숍의 기억을 찬찬히 복기해보면 상당히 청각적인 경험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숨> 퍼포먼스 뿐 아니라 전혜주 작가가 진행한 사운드 워크숍이 그러했고, 워크숍 말미에 함께 했던 산책 또한 각자의 장소에서 소리로 동행한 것이다. 이경미 기획자가 이끈 온라인 낭독회의 시간은 아마도 우리가 실제 얼굴을 마주했던 시간보다 길 터였다. 낭독회가 진행되는 20분이라는 짧지 않은 시간 동안 목소리와 호흡 소리, 책장을 넘기는 잠깐 사이의 정적뿐 아니라 마른 침을 삼키거나 코를 훌쩍이는 등 굉장히 사적인 소리까지 들을 수 있었는데, 소리의 측면에서 보자면 우리는 멀어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지나치게 가까워진 것 같기도 하다. 마치 퍼포먼스에서 귓속으로 바로 들려오던 소리처럼 촉각적이다. 그래서 그런지 워크숍에 참여했던 이들을 떠올리면 그들의 이름이나 얼굴보다 목소리가 먼저 떠오른다.




작은 섬으로 남을 사람들

그렇다고 우리가 끈끈한 사이가 되었느냐, 고 묻는다면 과장을 조금 섞어도 결코 그러하다고는 하기는 어렵다.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애초에 이 워크숍은 혼자 사는 1인 가구를 대상으로 한다. 만약 코로나 상황의 제약이 없어서 물리적으로 한 공간에서 시간을 보냈다고 해서 우리가 끈끈해 질 것은 아니었다. 애초에 우리는 끈끈해질 계획이 없었다.

혼자 사는 일은 으레 외로움이나 궁핍함과 연결되고는 했다. 또 자발적이라기보다는 어쩔 수 없는 상황으로 이해되는 일이 많았다. 4인으로 대표되는 정상가족을 꾸리기 위한 준비 단계, 혹은 정상가족이 어떤 이유에서든 해체되는 과정으로 여겨지곤 했다. 1인 가구가 어딘가 결여된, 미완결된 상태라는 인식은 지금도 여전하다. 그러나 개인이 개인으로 남는 것, 누군가와 잠시 잠깐 닿았다가도 이내 혼자 되는 것은 어째서 당연한 일이 되지 않는가? 타임라인에 나란히 퇴적된 다섯 개의 사운드 파일이 각기 섞임 없는 한 사람만의 소리를 담은 개별 파일이라는 분명한 사실처럼?

워크숍이 진행되는 꽤 긴 기간 동안 참여자들은 서로의 본명을, 나이를, 직업을, 가족을 묻거나 이야기하는 일이 거의 없었다. 그 질문을 피하는 것은 분명 의식적인 행위였다고 추측한다. (생각해보면 일반적인 상황에서 저런 질문을 하는 것은 딱히 궁금해서 묻는 것도 아니다) 대신 우리는 다른 질문을 던져보기로 했다. 그 질문들은 다른 사람을 향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스스로 말하고 싶은 것을 대신하는 질문이기도 했다. 혼자가 혼자에게 묻는 질문이다.




여름에 관한 가장 오래된 기억은 무엇인가요?

최근에 행복하다고 소리 내어 말해본 적이 있었나요?

아무렇지도 않았던 것이 갑자기 싫어지거나 무서워졌던 일이 있나요?

어떤 시간대와 날씨를 좋아하나요?

오늘 하루 잘 지냈다고 말할 수 있는 당신만의 기준이 있나요?

일 년 후 오늘과 같은 날에 무엇을 하고 있을 것 같나요?

갑자기 불안하거나 기분이 다운될 때 당신은 어떤 행동을 하시나요?

12월 31일 올해를 마무리하면서 스스로에게 잘했다고 할만한 혹은 칭찬하고 싶은 것은 무엇인가요?

최근 가장 기뻤던 순간은 언제인가요?

요즘 스스로 자주 해 먹는(차려 먹는) 음식 레시피는 무엇인가요?

지금 삶이 행복한가요?

삶에서 소중한 원칙이나 의미가 있나요?

어떤 삶을 꿈꿨는지요? 진정으로 살아가고픈 나의 모습은 무엇인가요?

올해 중 가장 큰 행복을 느낀 순간은 언제인가요?

최근에 가장 많이 느낀 감정은 무엇인가요?

새로운 변화를 시도한 적이 있나요? 있다면 어떤 변화인가요?

운전하거나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 무엇을 하나요?

요즘 가장 즐겨보는 유튜브 채널은 무엇인가요?

인생 책과 인생 영화는 무엇인가요?

나의 가슴을 뜨겁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요?





퍼포먼스를 할 때, 나는 회색 구름이 잔뜩 낀 날씨에 긴 풀이 자라난 초지가 바람에 흔들리는 장면을 상상했다. 다른 이들은 어떤 풍경을 상상했는지는 모르겠다. 하나 분명한 것은, 우리는 같은 소리를 만들어 내면서도 각자 다른 풍경 안에 있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퍼포머들은 물리적으로 같은 장소에 있지만, 결국 따로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한 집단으로 호명되었던 사람들은 또 다시 개인으로 돌아온다. 하지만 이 말이 우리가 ‘결국 혼자’라는 것을 부정적으로 바라보게 만들지는 않는다. 그러고보니 퍼포먼스를 할 때 넓은 공간에 띄엄 띄엄 선 이들의 모양은 섬처럼 보이기도 했다. 이것은 혼자를 잘 기르는 시간이고, 우리는 계속해서 홀로 섬으로 잘 남을 것이다.




[i] 이번 성남에서의 <숨> 작업은 지난 2019년의 작업에서 아쉬웠던 점을 다소 보완했는데, 인이어를 사용하여 퍼포먼스를 하는 동시에 모두의 숨소리를 모니터링할 수 있도록 한 것이 그 중 하나이다.